책은 물감 같다.
뭐든 쉽게 질려버리는 나의 세상에 색을 입혀준다.
어떤 책을 읽으면 한동안은 빛이나 사물의 색이 진하거나 건물의 모서리가 더 모질 때가 있고 사람을 보면 이 사람과는 연이 없겠구나 라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색의 경계가 명확했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색을 지켰다. 그 광경이 예뻤다.
집에 오는 길 횡단보도에서 어떤 여자를 마주쳤다.
나와는 연이 없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떠한 기대조차 들지 않았다.
cctv의 녹색 깜빡임의 주기가 일정했다. 그 색이 진했다.
원룸에 주차된 은색코팅된 자동차의 은색이 짙은 은색이었다.
노란 가로등빛의 퍼짐이 뾰족하면서도 뾰족하지 않았다. 위협적이지 않는 둥근 뾰족함이었다.
또 어느 한쪽도 더 넓게 퍼지려고 욕심내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자연스러움이 사랑스러웠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떨어진 거리 그리고 시야에서의 원근감을 느꼈다.
걷는 속도가 바뀌었다. 터덜터덜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여유가 좋았다.
현실에 젖어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돈벌이를 할 때도
사람들과 만나 시시껄렁하거나 묵직한 대화를 할 때도
살기 위해 밥을 먹고 운동할 때도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볼 때도
.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쉽게 질렸다. 분명 다른 색이지만 그 색의 구분 따위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독서는 그 책만의 색깔로 내 세상에 색을 입혀주었다.
어떤 책은 채도가 진했다. 어떤 책은 세상이 눈부실만큼 명도가 환하기도 했다.
그래서 독서를 끊을 수가 없나 보다.
아니, 끊었다가도 다시 독서로 돌아오나 보다.
어떻게든 바래진 세상에 색을 입히려다가 이내 안 되는 것을 깨닫고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잡은 책에서 칠해진 세상을 보게 된다.
그러니 계속해서 칠해야 한다. 내 세상은 계속해서 칠해져야 한다.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몇십 년 혹은 쓸데없이 발달한 의학덕에 100년 가까이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다.
'나의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마약 (0) | 2024.05.09 |
---|---|
지긋지긋한 사람이 되는 법 (28) | 2024.04.12 |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리고 행복 (35) | 2024.04.07 |
계약직 (4) | 2024.04.05 |
빈구석 (6) | 2024.04.04 |